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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구원의 확신(로마서 4:4-8)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 유무에 있습니다. 불신자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외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적 감각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얼마만큼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발동했느냐를 따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선물이라는 차원에서 출발되어야 하며 그래서 믿음이란 단어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과 그 구원에서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구원 얻은 신자로써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책임 있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 얻은 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요구받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해주시지 않는다는 조건은 아닌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적어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앞세워 도덕과 윤리적인 선한 행동들로 이뤄진 삶을 사는 것으로 구원을 확인하려 든다면 어떤 신자도 만족할 만한 구원을 확인 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게 되는 일은 많은 신앙 세월이 흐른 후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것이요. 긴 신앙 싸움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자신에게서 구원을 확인하기 위해 내 안에 어떤 조건이 있는가를 살피면 살필수록 거기엔 십자가나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의로움은 없고 여전히 죄 투성이인 자신의 못난 점만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확인은 신앙의 성숙한 신앙생활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있던 자, 무감각했던 내가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는 데 대한 확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었으면서도 죄인이었는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고 감각해낼 수도 없는 영적인 부분에 대한 감각이 생긴 것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구원은 확인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신약의 사건을 하나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도 싫고,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도 싫어서 그 눈뜬 사람을 붙잡고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합니다. 먼저는 ‘정말 예수라는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해 주었느냐?’ 이고 다음으로는 ‘네가 정말 소경이었느냐?’였습니다. 왜냐 하면 둘 중의 하나라도 참이 아닌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면 소경이 눈을 떴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한 것이 사실이라면 눈을 뜬 그가 원래는 소경이 아닌데 거짓말로 떴다고 한 것이 아니냐하고 우기려는 것입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가만히 분위기를 보니까 대답을 정직하게 하면 불이익을 당할 거 같으니까 이런 답을 합니다. ‘나는 다른 것은 모르겠고, 다만 제가 옛날에는 안 보였었는데 이제는 보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대답이 명확한 대답입니다. 우리 구원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믿지 않은 죄인과 구원을 얻은 중생한 자와의 차이는 감각할 수 있는 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겁니다. 영이 살아난 자는 감각합니다. 영원한 세계에 대한, 영혼에 관한 감각할 수 있는 겁니다.
신자들이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고 운동을 했다면 ‘뭔가 하나님께 혼 날거 같은 마음이 드는 것,’ 이런 것이 신자의 감각입니다. 그래서 신자와 불신자간의 큰 차이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에 관한 얘기가 나오거나 영적인 얘기가 나오면 그들은 감각이 없어서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천당 같은데 안 간다. 차라리 염라대왕한테 가겠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천국이 어떤 것이고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기때문이요 이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감각, 이러한 최초의 인식을 표현하는 단어가 ‘믿음’이고 또한 ‘회개’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회개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에 따른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한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의 최초의 인식이고, 최초의 경험이며,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체계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기초라 할지라도, 그것은 시작의 기초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결과로 생긴 첫 감각일 뿐입니다.
여기 이 질문을 한번 해 보자면 의로운 사람이 구원을 얻습니까? 아니면 불의한 사람이 얻습니까? 정답은 불의한 사람이 얻는다는 것입니다. 불의했던 사람이 구원을 얻어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그러면 구원을 얻는 때가 언제일까요?
1.불의한 사람이 의로워지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있는 때.
2.의로워지려고 노력을 하여 의로워진 때.
3.불의한 상태로 있는 때.
이 세 가지 중 어느 때에 구원을 얻습니까? 정답은 3번 불의한 상태로 있는 그 때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죄인이 회개할 때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 죄인일 때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오해하면 안 됩니다.
불의하다는 것, 죄인이라는 것을 성경은 “죽었다”고 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영이 죽은 걸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얻은 구원의 조건이 그에게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합니다. 즉 경건해질 각오를 했다든지, 경건해지려고 노력했다든지, 경건해졌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경건해지는 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 고 하는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6절을 다시 봅시다. ‘일할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와 7절에 있는 말씀은 시편 32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겁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나하실 사람은 목이 있도다’ 이 말씀은 ‘회개하는 자가 복이 있고 주를 앙망하는 자는 행복한 자이다.’라고 하지 않고 모두 수동태를 취합니다.
우리 신자의 성장 단계에서는 회개 없이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떤 원인 없이 그냥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 되도다’라고 하는 겁니다.
질문 시간
1.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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