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위치 : 양육프로그램 > 양육프로그램
제7과 죄가 무엇입니까?(출12:1-13)
여기 말씀을 보면 우리는 유월절이라는 한 절기를 만나게 됩니다.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지만 이 절기가 중요한 것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유월절날 잡혀 죽은 어린양으로 상징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36절“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소개한 것이 증명됩니다.
이 유월절 사건을 보면 얼마나 십자가가 무서운 자리인가?, 아니 우리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일으키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 위, 즉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달리셨을 지라도 우리를 대신하여 지신 죄값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올라가 있는 이상, 최후의 심판 때 나타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그대로 인류 최초로 임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마져도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셨던 자리입니다. 아주 지독한 저주와 형벌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너그러운 편이고 쉽게 슬쩍 넘어간 것 같이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냥 넘어간 걸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절대 용서가 없으십니다. 털 끝 만큼의 죄라도 반드시 그 죄 값을 물으십니다. 마태복음5:26절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십자가에 올라가야 하는데 내가 올라가지 않고 대신 예수님이 올라가신 것이 은혜가 있다. 사랑이 있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십자가를 보고 생각할 때 마다 치를 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십자가 사건 만큼 정말 자세히 설명하고 보여주는 메시지를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올라갔을 지라도 예외가 없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속물 이었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누리가 없는 자리입니다.
최후 심판 때 요한계시록 6:15-17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무서워 바위 더러 우리 위에 떨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보지 않게 가려 달라고 애원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사람들은 결론을 알고 십자가를 보기 때문에 쉽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굽에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내릴 때 애굽에는 사람 죽는 비명과 애통하는 소리가 진동을 했는데 유대인들은 웃으며 넘어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2:2절에 보면 유월절 양을 취할 때 각 사람마다 한 마리씩 잡아야 한다고 했으니 아마 유대인이 사는 동네에는 피비린내로 진동했을 겁니다. 얼마나 피비린내가 심했던지 구토가 나고 밥도 먹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문턱에는 바르라는 말이 없는 건 피가 문지방에 떨어져 있어서입니다. 온천지가 피 비린내 뿐입니다. 그 피 비린내를 맡으면서 웃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나 공포와 살벌한 분위기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의 고통은 이루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의사들이 연구를 했는데 손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고 진술할 정도입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면 낚시 바늘 같은 쇠갈고리 채찍으로 예수님의 등허리와 앞가슴을 쳐서 거기서 살점이 뜨게 나오고, 예수님은 바르르 떨으시며 아픔을 감내하신 모습은 죄가 얼마나 지독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렇게 무섭게 처리 하셨습니다.
현대 지성인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유치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은 지옥 갈까 무서워 믿는다고 하면 유치하다고 합니다. 죄, 저주, 심판 그런 얘기는 하지 말고 교회에서 사랑, 자비, 박애, 봉사 그런 좋은 얘기만 하자고 그럽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죄인이며 저주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요즘 세태를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남편이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정열을 다 바치고, 마음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아내가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죄책감에 아내 앞에 사죄를 하는 것이 옳은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정말로 그 여자를 사랑했다고 하고 우리 사랑은 순수했다고 그럽니다. 깨끗하고 부끄러움 없는 사랑을 했다고 합니다. 이건 그야말로 현대인들의 정신병입니다. 뭐가 진리인지 뭐가 참이고 생명인지 모르고 막가는 세태입니다. 아내를 두고 딴 여자를 사랑했으니까 그 순수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리자는 것은 인간 영혼을 파괴하는 위험한 장난이고 죽음의 길에 들어서 있는 겁니다. 인간 자신의 더러움 정욕과 개인적인 야비하고 편협하고. 무지한 정열을 밑도 끝도 없이 발산해 내는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버리는 세상입니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죄 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마귀의 종 된 짓거리만 일삼는 악한 인간들의 죄 된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죄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안에 천년 묶은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앉아 기회만 엿보고 있으며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그 죄 된 짓을 하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는데 대하여 본성적으로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아비인 사탄의 자녀였고,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때는 사탄과 충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죄인 된 자리에 있었고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다 죄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 안에 있고 보니 전에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기구들이 살인하는 기구요. 시기하는 기구요. 음란한 기구요. 우리 모든 지체가 죄를 짓고 있는 기구들 밖에는 갖고 있는 것이 없더라는 겁니다.
다윗 왕이 죄를 짓고도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 나단 선지자가 “바로 당신이 죄인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놀랬습니다. 그래서 시편51편을 썼습니다. ”죄악 중에 내가 출생했습니다“라고 했고 ”내가 모태에서 죄인으로 태어났다“라고 그는 죄를 몸서리치며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까맣게 모르고 살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점점 여론화하고 합법화하고 삽니다. 이혼을 합법화하고 낙태를 합법화하고 개판으로 살아도 다 합법화합니다. 누가 거기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가정을 갖고 한 사람의 사랑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어도 멋있는 로맨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부러워하는 세상입니다. 완전히 미쳐 날 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죄를 처리하는 그 기준과 방법은 예수님 때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진노의 대상이고 저주의 대상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무지 목매한 로마 군인들의 손에 무자비하게 죽으셨다고 혀나 끌끌 차고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고 감정에 젖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무섭게 철저하게 이를 갈고 계시는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현제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구원 얻기 이전에 우리 상태가 어떠했는지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죄인이라는 말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성경이 말하는 만큼 진저리나게 알고 있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성경은 죄에 대하여 더 이상 비참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처참한 꼴을 당하게 하시고 가시관을 쓰고 채찍 맞고 오해 받고 경멸 받고 모욕을 당하며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며 옆구리에는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흘리신 그 처참한 죽음이 하나님이 죄를 처리하시는 방법입니다.
신앙의 첩경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를 바로 인식하고 깨닫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질문의 시간
1, 출애굽 때의 잡은 양은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2, 하나님께서는 죄를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