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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죄에 대한 진노(히브리서 9:22)
오늘날 교회에서는 죄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사랑과 복에 관한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고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는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죄를 인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인 인류가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거기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했기 때문에 맨 처음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되었던 것이 죄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제일 먼저 손을 대신 것이 죄 문제였습니다.
히브리서 9:22절을 보면 이 점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합니다. 여기 보면 우리가 우리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도 그 용서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언급되지 않고 죄값을 치르는 방법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죄값을 치르셨다고 할 때 그 의미가 사단에게 하나님이 죄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잘못하여 오해를 잘하는 대목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빚을 받아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형벌을 받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상에 죽게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요구를 할 다른 대상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9장22절에서 언급되어진 것과 같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고 해결하신 것은 죄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죄 문제는 적당히 지나가고 그보다는 하나님의 사랑, 좋으신 하나님 쪽으로 우리의 시선을 자꾸 모으고 있습니다. 그건 성경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요한일서1:5-6절을 봅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 하고 그의 서신에도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여기 말씀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같이 있고 싶고, 사귀고 싶고 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바로 요한일서 1:5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므로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 빛과 같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두움 속에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빛과 공존할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와 사귐이 있기 위해서는 맨 처음 해결해야 될 문제가 어두움 가운데서 빠져 나오는 일이 먼저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둠 속, 즉 죄 가운데 있으면 결코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사랑의 관계 속에 거하려면 먼저 어두움 가운데서 나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죄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두움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어두움으로부터 꺼내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1:4,5절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밫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3:18-21절에도 같은 말을 하는데 예수님을 가리켜 빛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나님이 어두움 속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그 사랑의 관계를 유지키 위해 먼저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건져 내셔야만 했습니다. 왜요. 어두움과 빛은 절대 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기 위해서는 먼저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깊은 산자 일수록 죄에 대한 심각한 통회가 있다는 겁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에 들어간 감격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그 죄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를 휩싸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런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게 되어서 슬픔과 절망으로서의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희열이 넘치는 회개의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깨달음과 그 죄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늘 비례합니다. 즉 전자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후자도 더욱 더 크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시며, 결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 죄를 묵과하지 않는다는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므로 제일 먼저 해결해야 될 일이 바로 우리의 죄였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이전에 그가 얼마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반드시 죄에 대하여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죄는 결코 그 본질 면에서 약해지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도 죄에 대해서 시간이 흐른다 해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의 신앙을 보면 죄에 대한 무서움에서 점점 그 생각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제일 강하게 유혹받는 것이 있다면 아마 죄의 무서움에 대하여 점점 잊도록 요구받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듯이 바로 그 무서운 죄, 하나님께서 꼭 대가를 요구하시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는 그 죄는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변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일서 1: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면 우리가 사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피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가 우리 죄를 씻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것을 말씀하는 겁니다.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즉 그의 피로 인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하셨다고 합니다. 죄 가운데서 죄의 형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구해 주신 것이 은혜이지 그냥 죄를 간과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질문의 시간)
1,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앞서 선행되기 전에 먼저 행하셔야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과 함께 우리를 있게 하시려고 행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얼굴을 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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